ㆍ정신질환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ㆍ‘표적’이 된 그녀들 위험에 무방비 노출
ㆍ기댈건 술·담배…분열증·알콜중독
ㆍ정부도 관심밖 응급보호시설 거의 전무
윤미정씨(32·가명)는 어린시절 부모가 이혼했다. 엄마가 재혼해 새 가족과 살았지만 늘 겉돌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가출했다. 아르바이트를 한 맥주집 주인 언니가 잘 대해줘 친언니처럼 믿고 따랐다. 어느날 주인 언니는 윤씨 명의를 빌려 집을 사자고 하더니 윤씨 이름으로 거액을 대출 받아 사라졌다.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은 윤씨는 배신감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알코올중독자가 됐다. 가까스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도 월급 받으면 술을 마셨고 다음날 출근을 못해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무일푼인 그는 낮엔 시장 등을 돌아다니고 밤엔 24시간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앉은 채 졸았다. 그러다 1366 여성긴급전화를 통해 노숙인상담보호센터에 인계됐다.
서울 서초구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노숙하는 여성(동그라미 안)이 2일 취재진이 접근하자 황급히 자리를 뜨고 있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 교육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일찍 취업하거나 가출을 해 일용직 등 저임금의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다 실직하면 노숙자로 전락한다. 가족과 사회적 지지망이 취약해 주변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다.
여성 노숙인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그 양태는 남성노숙인보다 훨씬 복잡하다. ‘서울시 노숙인 정책의 성별영향평가 보고서’(2010)를 보면 남성노숙자의 60% 이상은 실직 및 사업 실패 등 경제적 어려움이 거리 노숙의 주 원인이다. 반면에 여성노숙자는 경제적 어려움(46.7%)과 함께 가족문제(43.3%)가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가족문제엔 가정폭력과 친족 성폭력, 정신질환에 의한 갈등이 포함된다.
실제로 거리 여성노숙인의 80~90%는 조현증(정신분열증) 등 정신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2012년 노숙인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또 ‘2014년 서울시 노숙인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노숙인요양시설(구 부랑인시설)에 수용된 여성 대부분과 재활시설 여성 절반 이상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활시설 여성 노숙인은 그나마 형편이 나아 12%만 그같은 고통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요양시설 남성노숙인의 18.6%, 재활시설의 32.8%가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노숙인의 정신건강을 지원해온 노정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여성노숙인의 정신질환이 많은 것은 애초부터 병이 있어 거리로 내몰리기도 하고, 거리생활이 길어지면서 병을 얻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신질환자는 자신의 병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족이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사실상 가족 도움을 받기 어렵다. 그러다보면 치료시기를 놓치고 병은 악화된다. 여재훈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소장은 “정신질환 노숙인이 응급 입원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은 국공립병원 뿐인데 여성 병상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지정병원 확충과 전문인력 투입 등 여성노숙인 정신보건 서비스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여성노숙인이 성폭행·임신 등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노숙생활 중 성범죄로 인해 임신과 낙태를 반복하거나 원치않는 출산을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간혹 자녀와 함께 노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이의 안전도 아슬아슬하다. 현재 서울 영등포역 부근 응급쪽방에서 임시 거주하고 있는 최양미씨(34·가명)도 7살 아들과 영등포역 대합실이나 영등포공원 등에서 노숙하다 발견됐다. 최씨는 지금도 낮이면 아들과 함께 PC방이나 영등포역 주변을 맴돈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말이 많이 어눌하다. 최씨는 “딸도 있지만 지인이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노숙인 정책과 서비스는 철저히 남성 중심이다. 여성노숙인을 고려한 정책은 거의 없다. 당장 거리에서 눈에 띄는 숫자가 적다는 이유에서다. 정말로 여성노숙인 숫자가 얼마 안되는 걸까. 전문가들 생각은 다르다. 지금처럼 거리, 지하도, 공원 등을 중심으로 노숙인 실태조사를 하는 한 여성노숙인 실태가 과소추정될 소지가 많다는 게 중론이다. 이성은 희망제작소 부소장은 “남성과 달리 여성은 신체적·성적 위협을 피해 일반 시민들에게 노출되는 장소보다는 장애인화장실, 교회 철야 예배장소, 기도원, 병원 대합실, 패스트푸드점, PC방 등을 전전하며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를 간과하면 법 제정의 근간이 되는 정확한 통계조차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김도희 사회복지공익법센터 변호사도 “시행 3년째인 ‘노숙인 등 복지법’에 여성노숙인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정확한 실태조사 선행과 더불어 여성노숙인 종합지원센터 건립이 필요하다. 주거·심리·양육 지원 등 여성노숙인의 상태와 욕구에 맞는 체계적 지원시스템을 갖추고, ‘탈노숙’이 가능하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연화 서울역 노숙인정신건강팀장은 “노숙 위기에 처한 여성을 긴급보호할 독립된 ‘여성일시보호시설’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현재 광역시·도 중 독립된 여성일시보호시설을 갖춘 지역은 대전시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시설이 없거나 있더라도 남성일시보호시설에 방 한 칸을 내 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남성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에 머물기를 꺼린다.
서울시의 경우 2013년부터 30명 규모의 여성일시보호시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운영법인측의 비리로 지난 3월 폐쇄됐다. 수도 서울의 여성노숙인 보호시설은 현재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현장상담소 여성응급구호방이 거의 유일하다. 서울시는 “동절기 전 설치를 목표로 현재 운영을 희망하는 법인과 논의중”이라고 밝혔다. 서정화 열린여성센터 소장은 “적어도 광역시에는 여성 전용의 일시보호시설을 설치해 인근 지역의 노숙 위기 여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고, 노숙이 장기화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각 도별로 1개소 이상 설치된 노숙인 요양시설도 서울시의 여성보호센터와 영보자애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남녀공용 형태다. 원용철 전국노숙인시설협회장은 “200~1000명 수용하는 요양시설의 경우 다수의 남성들 틈바구니에서 거주해야 하는 데다 자유도 제한돼 있어 여성노숙인의 거부감이 큰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여성의 탈노숙을 위해선 대규모 시설보다 소규모 자활시설을 더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성 자활시설도 서울에만 집중돼 있다. 서울엔 단신 여성, 모자가족, 부부가족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7곳 운영중인데 반해 인천과 대구는 각각 1곳의 여성시설만 운영되고 있다.
3~6개월간 쪽방, 고시원 등을 제공하는 임시주거지원사업도 서울시 등 종합지원센터가 있는 지역에서만 운연되고 있다. 환경이 열악하긴 하지만 응급상황에 처한 여성들에겐 주거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어 유용하다.
주거지원은 정부의 ‘탈노숙’ 주요 정책이다. 쪽방, 고시원, 노숙인 시설 등에서 3개월 이상 생활하거나 거리노숙을 한 노숙인에게 임대주택 입주자격을 준다. 그러나 만성적 정신질환을 가진 여성노숙인은 제외된다. 입주자격을 판단할 때 ‘주택 유지 가능성’을 주요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 임대주택 입주 신청 과정에서 여러차례 거절당한 여성노숙인이 자살한 사례도 있다. 서정화 소장은 “주거지원은 여성노숙인들의 지역사회 정착을 위해 매우 필요한 제도”라며 “공동생활이 어려운 정신질환자나 알콜문제가 있는 노숙인의 경우 우선적으로 주거를 제공하고 치료연계 등 밀착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이원화된 노숙인관리를 중앙정부가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여재훈 소장은 “중앙정부는 요양시설 위주로 지원하고, 거리 노숙인 관리는 지방자치단체에 이관하면서 도시 노숙인들이 중앙정부 정책에서 소외되고 있다”며 “중앙정부가 노숙인 사업 전체를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 소장은 이어 “여성노숙인 문제도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역마다 거점을 만들고 정책 전반을 콘트롤해야 지자체에서 따를텐데 현재로선 정부의 정책 및 예산에 대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임혜성 보건복지부 자립지원과장은 “거리 노숙인 관리를 지자체에 이양한 것은 예산뿐만 아니라 효율적 대응을 위한 고려도 있다”면서 “현 상태에서 재원을 합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국가가 거리 노숙인을 포함한 노숙인 정책의 종합계획을 통해 지방정부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여성 노숙인 정책도 더 강화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